현재 영남 일대는 청동기 시대 진.변한으로 통칭되는 약 24개의 부족들이 존재했다. 조선이 기원전 57년경 중국 한나라의 침략으로 분열되면서 그 일부 세력은 분열된 조선 유민들을 규합하여 한반도로 남하하면서 각각의 지방에 소규모 부족국가를 형성하게된다. 이들은 원래부터 한반도에 거주하던 토착세력과 조선이 중국 한나라의 침략으로 남하하면서 이주한 이주민들이 함께 혹은 따로 작은 부족국가를 형성하며 살아가게된다. 이처럼 조선의 유민들은 한반도 각지로 흩어지게되는데 사로국은 진.변한으로 통칭되는 영남 일대의 24개 부족중 하나로 경주지방 일대에서 생활하던 부족국가이다.
혁거세는 이러한 조선 유민들중 강력한 세력을 가진 부족장으로 여겨진다. 이들은 서기전 57년 경주 지방의 사로국에서 당시 사로국을 지탱하던 6개 부족의 추대를 받아 국가를 세우게 되는데 이때 국호를 '서라벌'이라고 하였다. 서라벌의 건국시기를 보통 서기전 57년으로 전해지는데 여기에는 역사적 문헌이 많이 남아있지 않다. 중국의 역사서에는 사로국이라는 국명만 소개되고 다른 내용은 전해지지 않고, 사로국과 서라벌의 초기 역사는 '삼국사기'로 전해지는 내용이 거의 대부분이다.
하지만 경주 지방에서 서기전 2세기당시의 유적들과 당시 조선의 문화와 연계되는 유적들이 발견되면서 대략적인 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 위만조선이 성립되는 과정과 멸망하는 과정에서 한사군이 설치되고 이후 한나라의 지배를 피해 한반도로 남하한 조선 유민들이 경주 지역에 정착하면서 사로국이 건국된것으로 유추가된다. 이에 신라인 자신들의 기원이 조선 유민들에 의해서 비롯되었음을 알고 있었으므로 신라의 건국을 조선 멸망 이후 최초의 갑자년인 서기전 57년으로 설정한것이다.

신라가 다른 고대국가들과 다른 특이점을 갖는것은 바로 국가 초기 왕위가 세습이 아닌 박씨와 석씨, 김씨가 왕위를 이어갔다는 점이다. 이는 신라의 위치에서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는데 신라는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으로 둘러쌓여있어 다른 부족국가들과의 교류가 원할하지 않았고 왕권역시 쉽사리 강화되지 않은데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렇기때문에 신라는 내물왕에 이르러서야 실질적으로 '왕'이라는 표현을 하게되고 그 이전에는 마립간, 이사금, 차차웅 등으로 최고권력자를 표현하였다. 이는 나이가 많은 연장자등을 뜻하는 의미로 내물왕 이전까지는 고대국가라는 의미보다는 부족국가의 의미가 더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의 왕위를 이어간 '성'씨중 박씨는 바로 신라의 시조인 혁거세의 자손들이다. 혁거세의 성이 '박'이 된 이유는 보통 혁거세를 알에서 태어난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 알의 크기가 '박'과 같다고 하여 박혁거세라 하였다.
신라의 4대 이사금인 탈해는 2대 차차웅인 남해의 사위인데 신라는 3대 유리까지는 김씨성이 왕위를 이어가지만 유리의 유언으로 4대 이사금으로 탈해가 권력을 이어받게된다. 탈해역시 혁거세와 마찬가지고 탄생에 대한 설화가 전해지는데, 탈해는 본래 서라벌 출신이 아닌 다파니국 출신으로 그의 어머니가 알을 낳게된다. 다파니국 왕은 이를 불길한 징조로 여겨 이 알을 궤속에 넣어 바다에 떠나보내게된다. 이 궤는 바다를 떠돌며 가야지역인 남해에 도착하게된다. 하지만 가야인들 역시 이상하게 생각하여 이 궤를 건지지않게되고 진한의 아진포라는 어구에 이르게된다. 이때가 혁거세 거서간의 즉위 39년으로 알려져있다. 이때가 기원전 19년으로 알려져있는데 삼국사기의 기록과 삼국유사의 기록이 조금 엇갈리는 부분이 있다.
당시 가야역시 수로왕으로 대변되는 이주세력이 가야지역에 정착하던 시점으로 탈해는 가야지역에서 김수로 세력과의 전쟁에서 밀려나 경주지방으로 이주하게된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탈해는 김수로로 대변되는 조선 유민족이 아닌 또다른 세력으로 한반도의 북쪽지역이나 혹은 울릉도 지역 출신이라는 주장과 김수로의 아내인 허황옥처럼 인도출신, 그리고 일본 큐수지방 출신등 정확하게 어느지역 출신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이러한 불분명한 출신임에도 탈해가 권력자가 된 이유는 그들 세력이 청동기가 아닌 철기 문명을 가지고 왔을것으로 추정한다. 이는 허황옥 신화처럼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이 실크로드를 통해 한반도로 새로운 문명을 전파했을것으로 보인다. 이는 실제 한반도에 철기가 보급된 시기와 거의 일치하는보면 완전히 터무니없는 주장은 아닐것이다. 이처럼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기존 토착세력과의 경쟁에서 이긴 세력이 또 하나 존재하니 이가 바로 신라의 마지막 왕족 '김'씨이다.
김해 김씨의 시조인 김수로왕의 탄생설화에서 알 수 있듯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에 대해허도 이와 비슷한 탄생설화가 존재한다. 하지만 김알지의 경우 삼국사기의 내용과 삼국유사의 내용이 조금은 상이한편이다. 삼국사기의 경우 금빛의 궤짝이 나뭇가지에 달려있는것을 흰 닭이 그것을 보고 울고있었는데 왕이 그 궤짝을 열어보니 사내아이가 들어있었다. 후에 성장한 이 아이는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나지 '알지'라 부르게되었고 금빛 궤작에서 나왔다고하여 성을 '김', 처음 발견된 장소인 시림을 계림으로 고쳐부르게 하였다고 전해진다.
삼국유사에서는 비슷하긴하지만 조금 다른 내용을 담고 있는데 처음 발견한 이가 왕이 아닌 '호공'으로 밤에 월성을 지날무렵 '서리'라는 부근에서 큰 빛이 시림속에 비추어 찾아가보니 황금궤짝이 나무 끝에 걸려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는 신라의 건국시조의 박혁서의 이야기가 비슷하여 사람들이 이름을 '알지'라 지었는데 알지는 순 우리말로 어린애를 뜻하는 말이다. 실제 김알지의 후손이 왕위에 오른건 13대 미추이사금이고 내물왕이 김알지의 후손으로 알려져있다.
신라의 왕위 세습은 내물왕 이후 김씨들에 의해서 독점되게 되는데 이는 당시 박, 석, 김씨의 왕위 계승전쟁에서 최종적으로 김씨가 승리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 초기 위 성씨들은 서로 협력과 경쟁을 이어가는 관계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권력의 공생관계가 깨어지게된다. 초기 박씨의 경우 석씨와 연합하여 세력을 형성하였지만 이후 다시 김씨와 연합하여 석씨를 밀어내게되는데 이후 석씨는 신라의 왕위 계승전에서 완전히 밀리고 만다.
하지만 신라의 왕족 '김'씨를 이야기할때 또다른 중요한 인물이 바로 김일제이다. 통일신라를 이룩한 문무왕릉비에는 '투후 제천지윤이 7대를 전하여'를 구절이 있는데, 이는 당시 당나라에 거주한 신라인 김씨부인의 업적을 '대당고김씨부인묘명'에도 신라 김씨의 뿌리가 김일제라고 기록되어있다고 한다. 이러한 사료를 바탕으로 신라의 김씨 왕족은 자신들의 조상이 중국 한나라당시 '투후'라는 관직을 받은 김일제의 후손이라고 받아들이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러한 부분은 7세기 후반 신라 김씨의 관념적인 시조를 찾는 일부의 과정에서 나온 주장이지 실제로 김일제가 김씨의 시조인 것은 아니라고 역사학자들은 보고있다. 일반적으로 가계를 신성시하기 위해 고대의 유명하거나 전설적인 인물을 시조로 두는 일이 많았기때문에 문무왕의 조상이 실제 김일제라는 명확한 사료는 전해지지않는다. 물론 김일제라는 인물은 실존 인물이고 그의 후손들이 어떠한 이유에서든 한반도로 이주하여서 정착했을 가능성은 있어보이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증명된 역사적 사실은 없어보인다.
산골 곰돌이님의
글이 좋았다면 응원을 보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