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끄적이기 _ 7. 온조의 남하결정, 그리고 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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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권력전쟁에서 유리에게 밀린 온조와 비류는 어머니인 소서노와 함께 남하를 결정하게 된다. 이중 비류는 미추에 터를 잡았고, 온조는 위례에 터를 잡게 된다. 하지만 미추는 땅이 습하고 농사를 짓기에 좋은 땅이 아니었다. 하지만 온조가 자리 잡은 위례는 한강을 끼고 있어 농사를 짓기에 최적화된 땅이었다. 결국 비류는 온조에 몸을 의탁하게 되고 그의 무리들이 위례로 모여 귀의하게 되는 이에 나라의 이름을 '백제'라 명하고, 이들 가계가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 뿌리를 두고 있기에 부여씨라고 하였다.

 

마한은 고대 한반도의 삼한시대의 정치연맹체를 의미한다. 서기전 1세기에서 3세기경 한강유역에서부터 충청도, 전라도 지역에 분포된 여러 정치 집단들이 등장하는데 '삼국지' 동이전에의하면 마한지역에 약 54개 소국의 명칭이 기록되어있다. 여기에 보면 큰 집단은 1만여 가구에서부터 작은 집단은 수천 가구에 이른다고 하였다.

 

마한에 대한 역사적인 자료가 매우 미비하기에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알기는 매우 어렵다. 하지만 당시 출토되는 유적들로 비추어볼때 마한지역은 대략 서기전 3세기에서 2세기 전 초기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각 지역에서 정치적 집단들이 난립하던 시기라 볼 수 있다.

 

하지만 당시 마한은 고대국가로까지 발전하지는 못하였다. 이는 강력한 지배세력이 나타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기때문에 이들은 각자의 소규모 지역에서 작은 공동체를 형성하여 고대국가로 들어가기 직전의 부족생활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당시 마한의 맹주의 자리는 충청도에 위치한 목지국이라는 세력이었는데 당시 목지국의 진왕은 여러 다른 사료들에 비추어볼때 진왕은 본인의 강력한 지도력이 바탕이 아닌 주변 여러 세력들의 연합으로 인한 선출로 맹주자리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4세기 백제의 전성기(사진출처 : 네이버)

 

처음 온조가 남하하여 위례지역에 터를 잡은 초기만 하더라도 백제가 아닌 '십제국'이라 하여 그의 신하 10명이 각각의 작은 나라를 형성하여 지역을 다스리게 하였다. 또한 이 당시만 하더라도 비류의 세력이 미추에 독자적으로 있던 시기이기도 하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백제'라는 국가의 이름은 3세기 후반 들어 한강의 하류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연맹국들과 마한을 비롯한 주변 부족국들을 통합하기 시작하면서 백제 역시 서서히 고대국가로 들어설 수 있게 된다. 백제가 마한지역을 통합하기 시작한 시기가 대략 4세기 이후인데 대략 비류왕 초기 시절이다.

 

비류왕은 백제의 11대왕이고 이때 나라의 기틀을 잡은 후에 백제는 탄탄한 내실을 바탕으로 눈을 국외로 돌리게 된다. 특히나 백제는 지리적 이점으로 중국과 왜와의 거래를 활발하게 이루어지게 된다. 이렇게 점차적으로 국력을 키운 백제는 13대 근초고왕에 이르러 당시 고구려, 백제, 신라의 고대 삼국국가 중에서 가장 먼저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특히나 근초고왕 26년 고구려 평양을 공격하여 고구려 왕을 패사시켰다는 기록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후일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침략하는 명분을 주게 된 하나의 사건으로 이 시점을 계기로 백제의 이름이 역사에 선명하게 등장하게 된다. 이후 백제는 15대 침류왕 시기에 불교가 처음으로 백제로 전래되었다.

 

개로왕 21년 고구려의 군대가 수도를 함락시키고 왕이 참수된다. 이후 백제는 도읍을 공주로 옮기게 되고 성왕 16년에 다시 부여로 도읍을 옮기고 성왕 30년에 불상을 일본에 전파한다. 이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의자왕 20년에 당나라와 신라의 나. 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는 멸망하게 된다. 이후 의자왕의 후예들이 왜와 연합하여 백제의 부흥을 꿈꿨지만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백제의 왕족은 온조를 시조를 하고 온조의 아버지는 고구려의 태조 주몽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와 백제는 기본적으로 혈연관계의 후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백제의 왕족들이 스스로 '부여'성을 붙이는 이유는 그들의 정체성을 나타낸다. 실제 고구려를 건국시킨 주력세력이 바로 부여의 후예들과 졸본지방의 세력이 연합해서 고구려를 건국하게 되는데 이에 백제는 자신들의 조상을 고구려보다는 그 위의 조상인 부여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는 어떤 식으로는 고구려와의 차별화하여 백제의 자주성과 독립성을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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